한때 대한민국 제조업을 설명하는 가장 간단한 공식은 ‘수주=성장’이었다. 조선, 플랜트, 건설기계 산업에서 수주잔고는 미래를 보장하는 일종의 안전판처럼 여겨졌다. 수주가 늘면 공장은 돌아가고, 매출은 뒤따라 오르며, 기업가치는 자연스럽게 상승한다는 믿음이 시장 전반에 깔려 있었다.
최근들어 기업들이 수익성 중심의 선별 수주 전략을 강화하고, 공정 관리와 원가 통제를 통해 프로젝트 단위에서의 현금 흐름 개선에 집중하는 등 현금중심경영에 집중하고 있다. [이미지=더밸류뉴스 | AI 생성]
하지만 지금도 그 공식은 유효한가. 최근 몇 년간 산업 현장에서 확인되는 변화는 분명하다. 기업들은 더 이상 ‘얼마를 따냈는가’보다 ‘얼마를 남기는가’를 먼저 묻기 시작했다. 수주잔고는 여전히 중요하지만, 그것만으로 기업의 체력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하다. 이제 시장은 매출이 아니라 현금흐름, 그중에서도 영업활동을 통해 실제로 창출되는 현금을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고 있다.
이 변화는 단순한 회계적 시각의 이동이 아니다. 산업 구조 자체가 바뀌고 있다는 신호다. 과거 제조업은 ‘규모의 게임’이었다. 저가 수주라도 일단 물량을 확보하면 설비 가동률을 유지할 수 있었고, 이는 곧 생존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원자재 가격 변동, 인건비 상승, 글로벌 공급망 리스크가 일상화된 지금, 수익성 없는 수주는 오히려 리스크로 작용한다. 수주잔고가 많아도 현금이 돌지 않으면 기업은 쉽게 흔들린다.
특히 조선과 플랜트 산업에서 이 같은 현상은 더욱 두드러진다. 과거에는 대규모 수주 발표가 곧 기업 가치 상승으로 직결됐지만, 이제 시장은 계약 조건과 마진 구조, 그리고 프로젝트 수행 과정에서의 현금 창출 능력을 더 집요하게 들여다본다. ‘좋은 수주’와 ‘나쁜 수주’를 구분하는 기준이 명확해진 셈이다.
◆ 수익성 중심 선별 수주 전략 강화… 현금 흐름 개선 집중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이른바 ‘현금 중심 경영’이다. 기업들은 수익성 중심의 선별 수주 전략을 강화하고, 공정 관리와 원가 통제를 통해 프로젝트 단위에서의 현금 흐름을 개선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단순히 외형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자본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방향으로 체질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이 같은 변화는 주요 제조기업들의 전략에서도 확인된다. 현대엘리베이터가 설치 중심에서 유지보수 서비스로 수익 구조를 다변화하고, 조선사들이 LNG선 등 고부가가치 선종 위주로 선별 수주에 나서는 것은 경기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 안정적인 현금 창출력을 확보하기 위함이다. 건설기계 분야 역시 신규 장비 판매를 넘어 부품 교체 등 애프터마켓(AM) 비중을 높이며 반복적인 현금 유입 구조를 만드는 데 주력하고 있다.
HD현대가 돛처럼 바람의 힘으로 선박의 추진력을 보태는 ‘풍력보조추진장치’의 해상 실증에 나서며, 차세대 친환경 선박 시장 선점에 속도를 내고 있다. 사진은 HD현대의 조선 부문 중간지주사인 HD한국조선해양이 최근 자체 개발한 풍력보조추진장치인 ‘윙세일(Wing Sail)’ 시제품을 선박에 탑재하고 해상 실증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HD현대]
이들 기업의 공통점은 분명하다. 더 이상 외형 성장만으로 평가받지 않으며, 실제로 현금을 만들어내는 구조를 구축하는 데 전략의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제조업이 ‘수주 산업’에서 ‘현금 산업’으로 이동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 ‘해양플랜트 사태’ 교훈… 저가 수주・설계 변경・공정 지연, 대규모 손실로 이어져
문제는 시장의 인식이 이 변화를 충분히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전히 일부 투자자들은 수주잔고와 매출 성장률에 집착한다. 그러나 이러한 지표만으로는 기업의 진짜 경쟁력을 판단하기 어렵다. 수주잔고는 미래의 가능성을 보여줄 뿐, 그것이 실제 이익과 현금으로 이어질지는 전혀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주목해야 할 것은 영업현금흐름과 잉여현금흐름이다. 기업이 벌어들인 이익이 실제로 현금으로 전환되는지, 그리고 그 현금이 부채를 줄이고 주주가치로 이어질 수 있는 구조인지가 훨씬 더 중요한 시대가 됐다. 이는 단기적인 실적을 넘어 기업의 지속 가능성을 가늠하는 핵심 지표다.
이 같은 변화는 투자 전략에도 영향을 미친다. 과거처럼 ‘수주 뉴스’를 따라가는 방식으로는 초과 수익을 기대하기 어려워졌다. 대표적인 사례가 조선·플랜트 업종이다. 2010년대 초반, 국내 조선사들은 대규모 해양플랜트 수주를 잇따라 발표하며 시장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특히 삼성중공업, 현대중공업, 대우조선해양 등은 수십억 달러 규모의 프로젝트를 따낼 때마다 주가가 크게 반응했다. 당시 시장은 ‘수주잔고 증가=미래 실적 개선’이라는 공식을 거의 의심하지 않았다.
삼성중공업은 2024년 중동지역 선주와 17만 4000 입방미터(㎥)급 LNG운반선 15척에 대한 건조계약을 체결했는데, 이는 단일 최대 수주 규모로 계약금액이 총 4조 5716억원이다. [사진=삼성중공업]
그러나 결과는 정반대였다. 해양플랜트 프로젝트 상당수가 저가 수주와 설계 변경, 공정 지연 등의 문제로 대규모 손실로 이어졌고, 기업들은 수년간 막대한 적자를 떠안았다. 수주 당시에는 ‘호재’로 인식됐던 계약이 시간이 지나며 오히려 현금 유출의 원인이 된 것이다. 수주 뉴스만 따라 투자한 경우, 장기적으로는 기대와 다른 수익률을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최근에도 유사한 흐름은 반복되고 있다. 방산이나 조선 분야에서 대형 수주가 발표될 때마다 단기적으로 주가가 반응하지만, 이후 시장은 계약의 수익성, 원가 구조, 인도 시점 등을 다시 따져보며 평가를 조정한다. 단순히 ‘얼마를 따냈는가’보다 ‘그 수주가 실제로 얼마의 현금을 남기는가’가 더 중요한 기준으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 "수주 뉴스의 함정 피해야"… 투자 패러다임도 '내실' 위주로
결국 수주 뉴스는 여전히 중요한 정보지만, 그것만으로 투자 판단을 내리는 시대는 지났다. 이제는 계약의 질, 프로젝트 수행 능력, 그리고 무엇보다 현금으로 이어지는 구조를 함께 보지 않으면 초과 수익은 커녕 기대수익조차 확보하기 어려운 환경이 됐다.
말하자면 제조업 투자 역시 ‘양적 성장’에서 ‘질적 성장’을 읽어내는 게임으로 바뀌고 있다. 결국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아직도 제조업을 ‘수주 산업’으로만 바라보고 있는가. 현장의 답은 이미 달라지고 있다. 제조업은 더 이상 단순히 계약을 따내는 산업이 아니다. 얼마나 효율적으로 생산하고, 얼마나 확실하게 현금을 회수하며, 그 현금을 어떻게 활용하는지가 기업의 성패를 가른다.
수주가 곧 미래를 보장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제 시장은 계약의 규모가 아니라 그 계약이 실제로 얼마의 현금을 만들어내는지를 묻는다. 제조업을 읽는 기준 역시 ‘얼마를 따냈는가’에서 ‘얼마를 남기는가’로 이동하고 있다.